최유미/수유너머 104 /2019-12-28


무니페리의 개인전 <횡단>은 ‘소수자’라는 안전한 위치에 기대지 않으면서, 어떻게 소수자성에 가해지는 폭력의 문제를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고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소수자’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생각만큼 무구하지 않다. 그것은 어떤 비판으로부터도 면제되기 쉬운 유리한 위치이기에, 예술에서도 학문에서도 오히려 선호되는 위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그 유리한 위치에 서기를 거부한다. “어떠한 저항의 태도이든 이름을 붙이고 갈래를 나눠버리는 순간.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이 된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작가 노트) 그러나 무엇이라고 명명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사유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 할 수 없으며, 함께 행동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딜레마다.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지 말아주소서>는 이 딜레마를 응시한다.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된 것은 김혜순의 시집, 『피어라 돼지』다. 구제역 방제를 위한 살처분이 몰아치던 어느 해, 시인은 우연히 수만 마리 돼지가 땅에 파묻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김혜순은 그것을 쓸 수 있었다. 돼지가 구덩이에 파묻히게 된 것은 오염된 신체라는 판정 때문이었다. 죽이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허겁지겁 구덩이에 산채로 가축들이 몰아넣어진다. 이런 가축판 홀로코스트가 끔찍하지 않을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살처분을 담당했던 수의사들 일용직 일꾼들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햄과 삼겹살을 얻기 위해서도 돼지를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죽이기를 가축판 홀로코스트와 연결시키지 못한다. 거기에는 감응의 통치술이 있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있는 작가는 그 통치술을 오래된 햄 광고를 통해 보여준다. 귀엽게 생긴 돼지 세 마리가 프로스티몬이라는 상표의 햄을 찬양하며 노래한다. 그들이 태어난 이유는 정부가 인증하는 프로스티몬햄이 되기 위해서다. 귀엽고 통통한 돼지 세 마리는 최상의 햄이 되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충분한 행복임을 노래한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오래 전에 어떤 유명연예인이 나왔던 광고가 돼지의 찬양노래와 겹쳐진다. 늘 그랬다. 아무런 가책 없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자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게 한다. 감응의 통치술은 행복한 얼굴들을 통해 지배하기와 죽이기를 숨긴다.

그러나 감응의 통치술은 곳곳에서 실패한다. 감응은 존재자들이 만나는 접촉지대(contact zone)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 접촉지대는 아무리 정교한 통치술로도 다 아우르지 못하는 우발성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김혜순이 그랬던 것처럼, 구덩이에 파묻히고, 오물에 처박힌 돼지를 대면하게 되었을 때,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비명을 질러대는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저 발버둥치는 ‘것’이 도대체 ‘누구’인가를 묻게 된다. ‘누구’와 ‘무엇’의 안정적인 구분이 와해되는 지점, 그 알 수 없는 구멍 앞에서 멍하게 서있게 되는 것이다.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지 말아주소서>는 아무리 틀어막아도 계속 뚫리는 구멍을 포착한다. 이 작품의 시작은 파란색 바탕화면이다. 파란색 바탕에서 허리세운 유인원이 빠져나온다. 허리세운 유인원의 형상은 인간이 더는 신의 자식이 아니어도 예외적이고 특별한 생명임을 과학적으로 증거 한다. 그는 진화의 가지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특별한 자다. 허리세운 유인원은 그의 세상, 나뭇잎이 무성한 가지들의 세상을 활보한다. 그런데 그의 세상은 흔들거린다. 그의 자리는 저 나무의 꼭대기일 텐데, 그 자리는 위협받고 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는 그 아래도 위도 어긋나 있고, 가지들은 흔들린다. 허리세운 유인원이 빠져나온 파란색 바탕은 구멍으로 축소되어 그를 따라다닌다. 그는 반복해서 구멍을 빠져나온다. “‘틈’은 금새 봉합되어 버리죠.” 하지만 ‘틈’은, 구멍은 다시 생기고, 끈질기게 허리세운 유인원을 따라 다닌다. 작가는 그 파란 색 구멍은 존재론적인 어긋남의 구멍, 규정성이 어긋나버리는 존재론의 자리라고 말한다.

존재론적인 어긋남의 자리는 아무런 규정성이 없는 텅 빈 자리가 아니라 차라리 모든 규정성이 용융되어버린 심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규정성은 그 심연으로부터 거듭 출현하지만 심연은 끈질기게 규정성의 자리를 따라붙으면서 규정성을 와해한다. 존재, ‘있음 그 자체’는 ‘누구/무엇 임’의 부재가 아니라, 수많은 ‘누구/무엇 임’들이 용융되어 있는 잠재성이고, 규정성, ‘누구/무엇 임’은 그 심연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규정성이 용융되어버린, 어둠의 심연, 그 존재론적인 구멍은 통상 검은 구멍으로 표현되어왔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을 파란색으로 그린다.

작가의 파란색 바탕은 이 관습적인 규칙을 깨뜨려버린다. ‘존재론적 무규정성 = 시커먼 구멍’이라는 관습적인 재현에 대해 내가 문제적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이미 진부해졌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더 심각한 것은 빛과 어둠의 이항대립이다. 규정성을 재현하는 빛과 규정성의 부재(혹은 과잉충만)로서의 어둠, 이 이항대립은 아무리 어둠의 선차성을 강조하더라도 거꾸로 세워진 이분법, 존재자의 모태로서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무니페리의 파란색 바탕은 윈도즈의 파란색 바탕화면, 혹은 익스플로러의 파란색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작업공간이자 연결공간의 색깔이다. 작업 공간이란 많은 것들이 함께 불려 나오고, 그 불려 나온 것들이 만나는 곳, 바로 ‘접촉지대’이다.

접촉지대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곳이지 규정성 이전의, 혹은 규정성의 모태가 아니다. 접촉지대는 규정하는 장소이자 규정성이 와해되는 장소다. 접촉지대는 그러므로, 무구한 공간이 아니고, 계급, 인종, 성 등의 온갖 색조가 묻어 있는 곳이자 그런 것들이 무너지는 장소다. 무니페리의 파란색은 다국적 거대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색깔이기도 하다. 그러나 접촉지대에서 파란색은 더 이상 거대 독점기업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색깔이 아니다. 컴퓨터 작업공간에서 일어나는 카피레트프(copyleft) 운동, 해킹, 시리얼넘버크래킹들을 생각해보라. 허리세운 유인원을 따라다니는 파란 구멍은 그가 접촉지대에서 먹고, 싸우고, 춤추고, 사랑하고, 죽이고, 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먹어버렸기 때문에, 먹은 것이 소화불량이 되었기 때문에, 먹은 것과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일이고, 그 일상이 구멍을 만든다. 허리세운 유인원의 세상이 흔들리고 어긋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접촉지대 바깥, 일상 바깥, 먹지 않고, 싸우지 않고, 춤추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죽이지 않고, 죽지 않는 곳은 없다. 그래서 허리세운 유인원은 예외적이고 특별한 그의 자리에 결코 오르지 못한다. 그는 다른 자에 기대 사는 일상적인 존재이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휴먼, 진화의 정점에 위치한 호모사피엔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신체는 접촉지대를 통해 들어온 온갖 타자의 신체들과 융합되어 있다. 작가는 광고에 나왔던 햄이 되기를 소망하는 귀여운 돼지를 그 타자의 신체로 그린다. 먹을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통통한 돼지, 감응의 통치술이 만들어낸 돼지는 나를 키메라로 에어리언으로 만드는 타자의 신체다. 고통이 없고, 욕망이 없고, 죽이기가 없는 세상,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내 속의 모든 것을 죽이겠다고 면벽 수행하는 나에게 내 속에 들어온 온갖 타자들의 이름, ‘돼지’는 소리친다. “타인의 고통을 먹고 사는 년아!” 이제 더 이상 아닌 척 할 수가 없다. 이 돼지의 외침을 들은 작가는 비거니즘 시위 장면에 죽이기 바깥은 없다는 강의를 겹쳐서 비거니즘에 균열을 낸다. 아닌 척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죽이기 바깥에 살 수 있는 척 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무저갱에 밀어 넣어지는 자들에게 성실하게 응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를 위해 작가는 콜로라도 고원의 블랙메사에 양을 치면서 살아가는 나바호의 디네족을 방문한다. 나바호 부족들이 치는 양은 추로라는 야생 양으로 16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이 들여왔고 디네족이 사는 땅에 적합하게 길들여졌다. 디네족의 여성들은 양털로 베짜기를 하는데, 양은 주로 방목을 통해 길러진다. 디네족의 가축들은 두 번이나 학살에 내몰렸다. 한번은 1863년 토착민의 야생가축들과 과실수를 개량종으로 바꾸기 위해서였고, 또 한번은 루즈벨트 대통령 때 과잉사육에 따른 지반침식을 이유로 진보적 농업관료들에 의해서였다. 이 두 번의 학살은 토착민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고, 그들의 목축경제의 기반을 완전히 앗아갔다.

그래서 디네족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작가가 방문한 블랙메사 베짜기 이벤트는 손상된 땅에서 복구를 위한 프로젝트 중 하나다. 1930년대에 엄청난 수의 양들이 학살되었음에도 디네들은 살아남은 양들을 멀리서 키웠고, 이 복구 프로젝트에는 블랙메사의 활동가들, 멕시코북부의 인디언들, 추로 양에 헌신하는 백인 과학자들이 개입되어 있다. 작가의 작업에 나오는 디네들은 양들을 정성껏 보살핀다. 디네들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들의 양들에게서 얻기 때문이다. 봄에 방목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은 양들이 안전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개미풀을 끓인 물로 의식을 치루고, 양들이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약초 태운 연기들 마시게 한다.

“내가 양을 취한 것이 아닙니다. 양이 나를 취한 것이죠.” 정성껏 돌보는 관계 속에서 ‘누구’와 ‘무엇’의 관계는 전도된다. 힘의 논리, 약육강식의 논리가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접촉지대는 고통당하는 타자의 얼굴만 보게 되는 장소가 아니다. 인간과 가축이 오랜 세월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보살피는 관계, 누구와 무엇의 관계가 고착되는 것을 방해하는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나바호 사람들은 이를 호조(hozho)라고 부른다. 호조(hozho)는 땅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호조(hozho)는 유한한 자들의 상호의존성 속에 사는 것이다.디네들이 그들의 기도에서 ‘호조’를 후렴구로 부르는 것은 그 상호의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것은 내가 타인의 고통을 먹고 사는 년임을 잊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나눌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덜하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나도 그를 위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를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함께 만들기라고 부른다. 나는 심포이에시스(sym-poiesis)를 공-산(共-産)이라고 번역하고 싶은데, 경제적 공산주의는 실패했지만 함께 번성하기를 꿈꾸었던 그 희망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먼이 아니고, 포스트휴먼은 더욱 아니고, 한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던 공-산의 존재다.

<버섯 오케스트라>는 체코에서 버섯에서 들리는 소리를 작곡한 Vaclav Halek의 작품을 연주하는 두 명의 핀란드 음악가의 연주를 촬영한 것이다. 버섯은 공-산을 위한 탁월한 실천가다. 이들은 주로 식물의 뿌리와 공생 관계를 이루는데, 나무들이 척박한 땅에도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버섯들과 공생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버섯은 나무뿌리에 미네랄과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 긴 균사를 뻗는다. 그러니까 버섯으로부터 작곡가가 들은 소리는 단지 버섯만의 소리가 아니라 그 버섯을 함께 만드는, 버섯과 공-산의 관계에 있는 모든 자들의 노래 소리다. 그것을 호조(hozho)의 음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호조(hozho)가 고정된 것 일리 없고, 공-산을 위해 미리 정해진 솔루션이 있을 리 없다. 먹기와 죽이기가 사라진 세상은 없고, 먹기와 죽이기가 실패하지 않는 세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물도 전기도 없는 블랙메사에서 사람들은 다시 가축을 키우고 망가진 땅을 위한 복구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작가가 디네 청년 피어슨과 인터뷰한 것을 보면, 호피족과 디네족의 갈등은 여전하다. 미국 식민자들은 호피족과 디네족을 이간질 시켜서 미국에서 가장 큰 블랙메사의 노천 탄전을 차지했고, 지금도 여전히 호피족을 앞세워서 디네족을 억압하고 있다. 블랙메사는 만만찮게 복잡한 역사적, 인종적, 생태적인 그물망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위험에 처한 삶의 불확실함을 알기 위해 언어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야기하는 얼굴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대체 어떤 매체가 우리에게 그런 연약함을 알려주고 느끼게 해 줄 것”인가라고 회의한다. 언어에 붙잡힌 우리는 어떤 매체도 언어로 의미화할 것이기에 재현에 붙잡힐 것이다. 언어가 아닌 다른 감각에 민감한 예술가도 필시 실패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알 수 없는 것을 보는 자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그 자신이 본 것을 말하려고 하는 자다. 호조(hozho)는 그 무망한 시도를 그만두지 않는 끝없는 실패의 실천 속에서만 있을 것이다. 무니페리의 끝없는 실패를 기원한다.